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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백수/해외드라마

힐하우스의 유령, 슬픔의 5단계와 크레인가 5남매 (스포)

※ 스포 주의!     



퀴블러-로스 박사의 '죽음을 수용하는 5단계'(또는 '슬픔의 5단계') 

'슬픔의 5단계', 또는 '죽음 수용의 5단계'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가 주장한 이론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들이 죽음을 예고당했을 때 보이는 심리적인 변화 과정을 설명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시한부 환자들뿐 아니라 예기치 못한 큰 슬픔을 겪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설명할 때에도 많이 응용된다. 

이 이론에 대해 대략적인 소개를 해 보자면 이러하다.

1단계는 부정denial.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무엇인가 잘못된 거라는 식으로 자신에게 닥친 현실 자체를 부정한다.
2단계는 분노anger.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는 분노로 그 원인을 자기 자신, 가족, 또는 주변의 어떤 환경 등에 분노를 표출한다. 
3단계는 협상bargaining. 부정과 분노를 거치고 난 뒤에는 '이번 한번만 살게 해주면 앞으로는 착하게 살게요' 등의 기도를 하는 식으로 누군가와든 협상을 하려고 한다. 슬픈 일이 일어나게 될 거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니 이제 그것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어지는 것이다.
4단계는 우울depression.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엔 깊은 무력감과 우울에 빠진다.
5단계는 수용acceptance. 슬픔을 더 이상 부정하지도 분노하지도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지도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단계다. 

  

슬픔의 5단계를 코믹하게 표현한 애니메이션 <심슨>의 한 장면. (0:30부터) 
의사로부터 24시간 뒤에 죽게 될 거라는 말(정확히는 갑자기 폭발할 거라는 말)과 함께 당신은 이제 슬픔의 5단계를 거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은 호머 심슨은 10초 안에 모든 단계를 소화해낸다. 


<힐하우스의 유령> 크레인 가의 5남매는 슬픔의 각 5단계다? 

<힐하우스의 유령>은 유령이 나오는 공포물이지만 가족을 잃는 슬픈 일을 겪은 등장 인물들의 트라우마, 슬픔, 그로 인한 서로간의 갈등과 화해 등 심리적인 문제를 유령 못지 않게 깊고 생생하게 다루는 드라마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훌륭한 호러물로 무척 무섭다!라는 평과 함께 드라마로서의 주제 의식이 잘 표현된 것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결말과 제작진이 살짝 숨겨놓은 설정들에 대한 무수한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몇몇 네티즌들은 작중 현재 시점의 크레인 가의 5남매가 서구에서 잘 알려진 <슬픔의 5단계>를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1단계 부정. 첫째 스티브 크레인 


장남 스티브 크레인은 힐하우스에서의 시간들, 특히 마지막날 밤의 일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라고 믿고 있다. 다른 가족들이 그날 밤 보았다는 체험들은 크레인 가의 유전적인 정신병력으로 인해 나타난 환각 내지는 망상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2단계 분노. 둘째 셜리 크레인

셜리는 첫째 스티브가 힐하우스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나머지 남매들의 말을 믿지 않음에도 그 경험을 책으로 써서 인기 있는 대중 작가가 된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그렇지만 꼭 스티브만이 셜리를 분노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약물 중독에 빠진 루크, 자살해버린 넬, 스티브의 돈을 받아서 쓴 테오와 자신의 남편 등 셜리는 가족뿐 아니라 매사에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기준이 뚜렷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상황이 생기면 크게 분노하며 그들을 자신의 담장 안에서 밀어내는 모습을 보인다 .



 3단계 협상. 셋째 테오

셋째 테오는 어릴 때부터 신비로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물건이나 사람을 만지면 그것의 감정, 경험, 과거에 일어난 일 등을 알 수 있는 능력이다.

테오가 보이는 '협상'은 비교적 희미한 편이지만, 테오는 이 능력을 이용해서 가족들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면 넬이 왜 힐하우스로 돌아갔는지 알기 위해 넬의 시체를 만져본다든지. 그 결과는 끔찍했던 것 같지만. 

 


 4단계 우울. 루크 크레인

루크는 <힐하우스> 이후로 자신을 따라다니는 대머리 귀신을 피하기 위해 마약에 빠져 사는 중독자로 나온다. 
루크가 끝을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가려고 애쓰고 있을 때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넬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다시 큰 위기에 봉착한다. 넬에게 난 너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루크의 모습은 우울감과 무력감을 표현한다. 


5단계 수용. 다섯째 넬 크레인 

넬과 '목 꺾인 여자' 이야기는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픈 이야기다. 아마도 크레인 가 5남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슬픈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넬이라는 데에 이견을 갖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넬이 힐하우스에 다시 찾아간 이유가 남편의 죽음과 점점 더 자주 나타나는 '목 꺾인 여자'로 인해 정서적 불안이 심해져서였든(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의사 상담 없이 안 먹고 있던 중에 한 일이다! 그럼 절대 안 된다구 넬리야..) 넬은 힐하우스에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넬의 유령은 가족들에게 그간 자신과 가족들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은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도 바뀌지 않을 일이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나머지는 그저 공중에 흩어지는 색종이 조각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해석에 대한 감독의 반응 

감독 마이클 플래너건은 한 인터뷰에서 팬들이 내놓은 다양한 추측과 해석 중 이 '슬픔의 5단계'와 크레인 5남매의 연관성에 관한 것이 가장 놀랍고 기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출처 : https://www.thewrap.com/haunting-of-hill-house-red-room-mystery-bent-neck-lady-season-2/)
각 인물들의 배경을 만드는 단계에서 가장 밑바탕에 뉘앙스 수준으로 담았던 이야기가 맞다고. 



사실 '슬픔의 5단계' 이론은 60-70년대에 처음 나온 뒤로 다양한 반박과 비판을 불러오기도 했던 이론이다.
사람들의 감정은 '단계'로 찾아오지 않는 법이니 그럴 만도 하다. 슬픈 일 앞에서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슬퍼하고, 수용하다가도 다시 분노하게 되기도 한다. 마치 시간은 선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는 넬의 말처럼, 내가 맞닥뜨리는 결과는 반드시 원인 뒤에 찾아오지도 않고, 또는 원인이 반드시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 이론의 타당성을 떠나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들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몰입하게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다시 한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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